[뉴욕=이데일리 김상윤 특파원] 미국의 소비자물가가 2020년 이후 처음으로 전월 대비 하락하고 근원물가도 보합을 기록하면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예상보다 빠르게 완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최근 물가 둔화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와 중동 정세, 관세 정책 등이 다시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이번 물가 지표는 연준에 일단 숨통을 틔워준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국제유가 향방과 중동 정세, AI 투자 확대에 따른 수요 증가, 관세 정책 등 물가를 자극할 수 있는 변수가 여전히 남아 있는 만큼 연준도 향후 발표되는 경제지표를 신중하게 지켜보며 통화정책 방향을 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 노동부는 14일(현지시간) 6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월 대비 0.4% 하락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다우존스가 집계한 시장 예상치인 0.2% 하락보다 낙폭이 컸으며,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인 2020년 4월 이후 가장 큰 월간 하락이다. 전년 동월 대비 상승률은 3.5%를 기록해 전달(4.2%)보다 0.7%포인트 낮아졌고 시장 예상치(3.8%)도 밑돌았다.
변동성이 큰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지수(Core CPI)는 전월 대비 보합(0.0%)을 기록했다. 시장에서는 0.2% 상승을 예상했지만 이를 크게 밑돌았다. 전년 동월 대비 상승률도 2.6%로 전달(2.9%)과 시장 전망치(2.9%)를 모두 하회했다.
이번 물가 둔화는 에너지 가격 하락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에너지 물가지수는 전월 대비 5.7% 떨어졌으며, 휘발유와 난방유 가격은 모두 9% 이상 하락했다. 특히 휘발유 가격은 2022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지난달까지 이어졌던 이란 전쟁에 따른 에너지 가격 급등세가 일시적으로 진정되면서 소비자들의 물가 부담도 완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에너지 가격은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여전히 15.7% 높은 수준이다. 최근 미국과 이란 간 군사적 긴장이 다시 고조되면서 국제유가가 반등하고 있어 에너지발 인플레이션 압력이 다시 커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연준이 가장 주의 깊게 보는 서비스 물가도 뚜렷한 둔화세를 나타냈다. 에너지를 제외한 서비스 물가는 전월과 같은 수준을 유지했고, 주거비는 0.1% 오르는 데 그쳤다. 운송서비스 가격은 0.3% 하락했다. 최근 물가를 끌어올렸던 호텔 숙박료도 1년여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떨어지며 4개월 연속 상승세를 마감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미국 11개 도시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개최로 일시적으로 늘었던 여행 수요가 진정된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품목별로는 식료품 가격이 전월 대비 0.2% 상승하며 3개월 연속 올랐다. 쇠고기와 계란, 유제품 가격 상승이 영향을 미쳤다. 신차 가격은 보합을 기록했고 중고차 가격은 0.2% 하락했다. 관세와 운송비 영향을 많이 받는 의류 가격도 0.6% 떨어졌으며 자동차 보험료 역시 큰 폭으로 하락해 근원물가 상승세를 억제했다.
반면 AI 투자 확대의 영향이 반영된 정보기술(IT) 관련 품목은 높은 상승세를 이어갔다.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주변기기 가격은 전월 대비 2.3%, 전년 동월 대비 17.4% 급등해 관련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높은 연간 상승률을 기록했다.
물가 발표 직후 금융시장은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주가지수 선물은 상승했고 미 국채 금리는 하락했다. 투자자들은 연준이 이달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설 가능성을 낮춰 반영했다.
하지만 시장은 이번 지표만으로 연준의 긴축 기조가 끝났다고 보지는 않고 있다. 금리선물 시장에서는 이달 28∼29일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가 현행 연 3.50~3.75%로 유지된 뒤, 9월 회의에서 0.25%포인트 추가 인상이 이뤄질 가능성을 여전히 높게 반영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월러 연준 이사는 전날 “근원 인플레이션이 연준의 목표인 2%를 향해 안정적으로 움직인다는 확신을 얻으려면 앞으로도 수개월간 긍정적인 물가 지표가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케빈 워시 연준 의장도 이날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 제출 연설문에서 물가 안정 의지를 재차 강조했다. 그는 “연준의 최우선 목표는 통화정책을 올바르게 운용하는 것”이라며 “정책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지난 5년간 이어진 인플레이션 급등은 과거의 일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연방공개시장위원회 위원들은 지속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물가 안정을 회복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주 공개된 6월 FOMC 의사록에서도 연준 내부의 경계감은 확인됐다. 의사록에는 AI 투자 확대에 따른 수요 증가와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긴장,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 등이 향후 인플레이션을 다시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담겼다.
© 이데일리 & 이데일리TV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