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홍수현 기자] 29세에 집을 떠난 아들은 57세가 돼서야 돌아왔다.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4개 대륙을 걸어서 횡단한 영국 탐험가 칼 부시비가 세계 일주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98년 칠레 최남단에서 출발해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하고 얼어붙은 베링해협을 건넌 뒤 아시아와 유럽을 거쳐 귀향한 것이다.

3일 (현지시간) AP·로이터통신과 가디언 등에 따르면 부시비는 이날 영국 북동부 항구도시 헐의 퀸 빅토리아 광장에서 시민 수백 명의 환영을 받았다. 1998년 11월 1일 칠레 남단 푼타아레나스에서 출발한 지 28년 만이다. 그는 지난 1일 출발 당시와 같은 날짜에 험버 다리를 건너 헐에 도착한 뒤 이날 고향에서 공식 환영 행사를 가졌다.
‘골리앗 원정’이라는 이름의 여정은 1998년 11월 칠레 남부에서 시작됐다. 그가 고수한 두 가지 규칙은 완주할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과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부시비는 이 원칙에 따라 약 5만㎞를 걷고 헤엄쳤다. 베링해협의 얼어붙은 바다를 건넜고, 카스피해와 영국해협은 수영으로 통과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한 뒤 아시아와 유럽을 거쳐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동 거리는 3만 6000마일(약 5만 8000㎞), 방문 국가는 30개국으로 집계됐다.
4개 대륙을 건너면서 얼어붙은 바다, 사막, 정글, 산맥을 횡단했는데 여행 도중 인터뷰에서 “걷는 건 지옥처럼 지루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여행이 길어진 것은 금융 위기, 전염병, 비자 발급 금지, 전쟁 등과 같은 예측 불가능한 장애 때문이었다.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러시아에서 간첩 혐의로 구금돼 추방 선고를 받았으며 게릴라와 북극곰의 위협도 받았다.
그가 이런 세계 일주를 계획한 배경은 아버지 영향이 컸다. 육군 출신인 아버지 키스는 1990년대 중반 부시비에게 건넨 생일 카드에 특수부대원 두 명이 런던에서 뉴욕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지를 놓고 논쟁했다는 이야기를 적었다. 당시는 해수면이 낮았을 때라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했던 베링 육교를 통해 인류가 이동했을 것이라는 가설에서 착안한 이야기였다. 모험을 좋아했던 부시비는 이를 계기로 세계 일주를 구상했다. 영국 육군 공수부대에서 복무한 뒤 1997년 전역했고, 이듬해 실제 여정에 나섰다.
부시비는 당초 5년이면 원정을 마칠 것으로 예상했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이 잇따랐다. 2001년 콜롬비아와 파나마 사이의 험준한 정글 지대인 다리엔갭을 통과한 뒤 파나마에서 18일간 구금됐다. 2006년에는 미국 알래스카에서 얼어붙은 베링해협을 건너 러시아에 도착했지만 불법 입국 혐의로 체포됐다. 이후 러시아 비자 문제로 수년간 발이 묶였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주요 후원사까지 잃었다.
코로나19 대유행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겹치면서 여정은 더욱 길어졌다. 러시아와 이란을 거치는 육로 이동이 어려워지자 2024년에는 카자흐스탄에서 아제르바이잔까지 카스피해 약 288㎞를 31일에 걸쳐 헤엄쳤다.
지난달에는 영불해협을 사흘 동안 약 20시간 수영해 영국 땅을 밟았다. 해저터널을 걸어서 통과하겠다는 요청이 거절되자 직접 바다를 건넌 것이다.

부시비는 자신의 여정을 ‘21세기 오디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여정의 절반은 환경의 문제였고 나머지 절반은 행정적·지정학적 문제였다”며 “때로는 기다리는 것만이 해결책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28년 가운데 걸어서 이동한 기간은 약 15년이었다고 밝혔다. 여정을 중단해야 할 때마다 마지막으로 멈춘 지점으로 돌아가 다시 출발했다.
28년의 원정 기간 동안 가족의 삶도 크게 달라졌다. 출발 당시 8세였던 아들 애덤은 어느새 36세가 됐고, 부시비에게는 12세 손녀도 생겼다. 손녀를 처음 만난 부시비는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진 여행에 대해 “이게 21세기 오디세이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기적인 일이었다”며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감정적인 대가를 치른다”고 했다. 귀향 환영식에서는 “나 혼자 해낸 일이 아니다. 개인부터 여러 나라 정부까지 수많은 사람이 도왔다”며 “말 그대로 온 세상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했다.
앤디 버넘 영국 총리도 축하 메시지를 보내 부시비의 귀환을 환영했다. 현재 독일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초크가 그의 28년 여정을 담은 장편 다큐멘터리 ‘워크 오브 라이프’를 제작 중이며, 부시비는 앞으로 영국 각지를 돌며 강연에 나설 예정이다. 그는 또 다른 장거리 원정에 나설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28년이면 충분하다”며 “이제 등산화는 걸어둘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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