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세계 최대급 원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며칠 안에 원유를 제대로 내보내지 못하는 상황에 몰릴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호르무즈해협을 피해 원유를 실어내던 사실상 유일한 우회로마저 끊기면서다. 북반구 겨울과 수확철을 코앞에 두고 세계 에너지 시장이 받는 압박도 커지게 됐다.
◇드론에 뚫린 ‘호르무즈 우회로’…복구 일정 불분명마켓워치는 14일(현지시간) 사우디가 홍해로 원유를 실어내던 동서송유관 가동을 멈추면서 하루 최대 500만배럴에 이르는 수출 물량을 다시 호르무즈해협으로 돌려야 할 처지에 놓였다며, 얀부항에 쌓아둔 1주일치 재고가 바닥나는 다음주면 수출이 급격히 줄어들 수 있다고 내다봤다.
사우디는 이라크에서 날아온 드론 공격으로 송유관 일부가 파손되자 지난 11일 동서송유관 가동을 멈췄다고 밝혔다. 복구에 얼마나 걸릴지는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
예멘 후티 반군 소행으로 추정되는 이번 공격은 리야드와 메디나 지역을 동시에 때린 것이어서 한 곳만 맞았을 때보다 대응이 까다롭다. 사우디는 피해 규모나 재가동 일정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AP통신은 이날 역내 당국자 2명을 인용해 이 송유관이 “몇 주간” 멈춰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복구는 간단치 않아 보인다. 지난 4월 이 송유관 펌프장 한 곳이 공격받았을 때는 7일 만에 정상 가동이 회복됐다. 하지만 야니브 샤 리스타드에너지 애널리스트는 위성 사진상 이번에는 “여러 지점에 더 광범위한 손상”이 확인돼 재가동까지 더 걸릴 수 있다고 봤다. 수리를 마친 뒤에도 총연장 1200㎞에 이르는 송유관 전체를 압력 시험하고 부품을 점검해야 한다고 마켓워치는 부연했다.
동서송유관은 호르무즈해협을 거치지 않고 원유를 내보낼 수 있는 핵심 통로였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으로 호르무즈해협 통행이 크게 막히면서 사우디가 기대온 우회로다. 사우디는 전쟁 초기 동부 유전에서 뽑은 원유를 이 송유관으로 홍해 연안 얀부항까지 보내 수출하는 쪽으로 빠르게 방향을 틀었다. 개전 직후인 지난 3월에는 수송 능력을 최대치인 하루 700만배럴까지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전쟁 전 이 송유관이 나른 물량은 하루 100만배럴에도 못 미쳤다.
◇퇴로 하나씩 막혀…생산은 이미 23% 급감이 길이 막히면서 사우디는 다시 호르무즈해협에 기대야 한다. 플로렌스 슈미트 라보뱅크 선임 에너지 전략가는 홍해로 향하던 물량을 페르시아만으로 되돌려야 한다면서도 “이 가운데 얼마나 되돌릴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며칠간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는 물량에 많은 것이 달려 있는데, 그곳 흐름은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호르무즈해협 통과량은 집계 자체가 어렵다. 선박들이 이란의 공격을 피하려 위치 신호를 꺼버리기 때문이다.
다른 퇴로도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이란이 지원하는 예멘 후티 반군이 홍해 바브엘만데브해협을 사실상 통제하면서, 지난 7월 이후 사우디가 쓰던 이집트 경유 지중해 수출로도 막혔다. 이 우회로 역시 동서송유관을 거쳐야 했다.
생산도 이미 크게 흔들렸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자료를 보면 사우디의 지난달 산유량은 하루 624만배럴로 전월보다 190만배럴(23%) 급감했다. 사우디는 지난해 하루 960만배럴을 생산해 미국과 러시아에 이은 세계 3위 산유국이었고, 생산량의 3분의 2가량을 수출해왔다. 전쟁 전에는 세계 1위 원유 수출국이었다.
◇“경유값이 물가 더 빨리 밀어올린다”시장도 공급 차질을 본격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했다. 샤 애널리스트는 이날 보고서에서 “중동 분쟁이 이미 원유에 웃돈을 붙이고 있는데, 사우디 동서송유관까지 멈추면서 또 하나의 큰 제약이 더해졌다”고 말했다. 이날 가격 반응이 비교적 잠잠했던 것은 사우디 재고로 당분간 버틸 수 있다고 봐서인데, 차질이 5~7일치 재고를 넘어 길어지면 “상황은 빠르게 바뀔 수 있다”고 그는 경고했다.
런던 시장에서 브렌트유는 이날 1% 오른 배럴당 105.68달러(14만2509원)에 마감했다. 장중에는 109.80달러(14만8065원)까지 올랐고 이달 들어 상승폭이 17%에 육박한다. 미국 평균 경유 소매가는 이날 다시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휘발유 평균가도 갤런당 4.3163달러(5821원)로 1주일 전보다 16센트(216원) 올랐다. 여름 운전 성수기가 끝난 9월부터는 값이 내리는 것이 보통이어서 이례적이다.
에릭 스미스 툴레인대 교수는 경유값 상승이 휘발유보다 물가에 더 빨리 영향을 준다고 지적했다. 그는 “경유는 우리가 먹고 쓰고 만드는 모든 것을 나르는 데 쓰이지만, 휘발유는 주로 사람을 이동시키는 데 쓰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송유관은 좋은 방안이고 많을수록 좋다”면서도 “다만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안다면 때리기가 더 쉽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 이데일리 & 이데일리TV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