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윤기백 기자] 방송 직전까지 대본을 수정하고 밤샘 촬영으로 방송 분량을 채우던 드라마 제작 현장이 달라졌다. 촬영에 앞서 전체 대본과 일정을 확정하고, 영화 수준의 영상과 음향을 구현하는 제작 방식이 확산하고 있다.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한 지 10년. 콘텐츠 소비 방식뿐 아니라 드라마를 만드는 시스템에도 변화가 일었다. 특히 영화계 인력과 기술이 시리즈 제작에 유입되면서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도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쪽대본에서 사전 제작으로…달라진 제작의 문법이러한 변화를 상징하는 것은 영화감독들의 잇단 시리즈 진출이다.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도가니’, ‘수상한 그녀’, ‘남한산성’을 연출한 영화감독 출신이다.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은 ‘지옥’과 ‘기생수: 더 그레이’를, ‘차이나타운’의 한준희 감독은 ‘D.P.’ 시리즈를 선보였다. ‘범죄와의 전쟁’의 윤종빈 감독도 ‘수리남’으로 시리즈 연출에 도전했다.
영화감독들의 합류로 촬영과 미술, 음향, 후반 작업 등 영화 제작의 노하우가 드라마에 본격적으로 접목됐다. 여기에 한국 드라마 특유의 대중성과 서사적 강점이 결합하면서 극장 영화에 버금가는 완성도의 시리즈들이 등장했다.
‘소년심판’, ‘Mr. 플랑크톤’, ‘참교육’을 연출한 홍종찬 감독은 넷플릭스와 작업하며 체감한 가장 큰 변화로 ‘오래 남는 작품’을 꼽았다. 홍 감독은 “유통기한이 짧은 상품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 남는다는 감각이 있다”며 “연출자의 생각을 존중하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작품 활동을 지속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제작 일정이다. 과거 방송 드라마는 편성 일정에 맞춰 촬영과 방송을 병행하면서 촬영 직전에 대본이 전달되는 이른바 ‘쪽대본’ 관행이 빈번했다. 반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는 전 회차를 사전에 완성하는 제작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글로벌 동시 공개에 필요한 자막과 더빙 등 현지화 작업까지 미리 준비해야 하는 만큼 촬영과 후반 작업 일정도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넷플릭스가 제작 과정에서 강조하는 원칙은 ‘픽스 인 프리’(FIX IN PRE)다. 촬영과 후반 작업에서 발생할 문제를 사전에 발견하고 해결하자는 취지다. 넷플릭스 관계자는 “모든 것을 프리 프로덕션에서 해결하자는 말이 아니다”며 “후반에서 제기될 이슈를 초기에 발견해 필요한 결정을 빨리 하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기리고’의 박윤서 감독 역시 “처음에는 ‘나는 영화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작업하면서 많이 없어졌다”며 “영화 스태프들과 함께하고 시스템도 영화와 동일하게 갖춰져 있어 재미있게 작업했다”고 밝혔다.
제작 공정도 전문화됐다. 편집과 색보정, 음향, 시각특수효과(VFX) 등 후반 작업의 일정과 품질을 총괄하는 ‘포스트 슈퍼바이저’가 핵심 인력으로 자리 잡았다. 제작의 중심이 촬영 현장에서 후반 작업까지 확장된 것이다.
◇안방에서도 극장처럼…높아진 기술과 제작 기준제작 시스템의 변화는 영상과 음향의 품질 향상으로 이어졌다. 넷플릭스는 2014년 4K 스트리밍, 2016년 HDR을 도입한 데 이어 2017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를 계기로 돌비 애트모스 지원을 발표했다. 안방에서도 극장에 가까운 몰입감을 제공하겠다는 전략이다.
‘오징어 게임’과 ‘가능한 사랑’의 색보정을 맡은 박진영 컬러리스트는 HDR 기술 도입으로 영상 표현의 가능성이 넓어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조금 더 무궁무진한 영상을 구현할 수 있구나, 표현할 수 있구나를 경험했다”며 영상의 아름다움과 완성도에 더욱 힘쓰게 된 계기라고 설명했다.
음향 분야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지옥’ 등에 참여한 김석원 사운드 슈퍼바이저는 “넷플릭스가 들어오면서 높은 사양을 도입했고 ‘사운드의 기준’이 생겼다”며 “세계의 기준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그게 자신감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할리우드 작품으로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VFX 역시 촬영 이후 장면을 보완하는 작업에서 벗어나 기획 단계부터 작품의 세계관과 촬영 방식을 설계하는 핵심 공정으로 발전했다. ‘스위트홈’, ‘지옥’, ‘기생수: 더 그레이’처럼 복잡한 시각효과가 필요한 장르물이 가능해진 배경이다.
넷플릭스 관계자는 “‘스위트홈’ 이후 넷플릭스 작품의 VFX에 대한 공감대가 업계 전반에 형성됐다”며 “파트너 업체들과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기술적 역량을 발전시켜 왔다”고 설명했다. 홍정호 VFX 슈퍼바이저도 “VFX를 단순한 후반 작업으로 보지 않고 감독이 시나리오를 건네주는 순간부터 끝까지 함께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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