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경은 권오석 기자] 금융당국이 증시 체질 개선을 위해 마련한 ‘시가총액 미달 기업 상장폐지’ 제도가 법원의 제동에 멈춰 섰다. 법원이 한국거래소의 개정 상장 규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서다. 시총 요건 미달 기업들의 줄소송이 현실화하면 당국이 추진해온 부실기업 퇴출 정책에도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법원, 거래소 시총 기준 상폐요건에 제동5일 금융투자업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남부지법 민사51부(수석부장판사 권성수)는 지난 2일 코스피 상장사 주연테크와 코스닥 상장사 케이엠제약이 거래소를 상대로 낸 상장폐지 결정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각각 인용했다.
재판부는 시총 미달을 이의신청이나 소명 기회가 배제된 형식적 상장폐지 사유로 분류한 점이 기업의 절차 참여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강화된 상장유지 기준 시행 시점을 기존 예정보다 앞당긴 부칙 역시 비례의 원칙에 반해 위법·무효라고 봤다.
법원이 거래소 규정 조항의 부당성을 인정하면서 파장은 다른 기업으로 번지고 있다. 거래소는 시총 미달 사유로 상장폐지가 결정돼 정리매매가 진행 중이던 세진티에스와 에이에프더블류의 정리매매를 같은 날 중단했다. 두 회사는 각각 지난달 25일부터 정리매매에 들어가 오는 12일 상장폐지를 앞두고 있었다.
상장폐지 위기에 놓인 다른 기업들의 법적 대응도 잇따르고 있다. 인공지능(AI) 영상분석 전문기업 핀텔은 관리종목 지정 결정 효력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코스닥 기술특례 상장기업으로서 연구개발(R&D)과 사업화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단순 시총 미달만으로 퇴출 절차를 진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유에서다. 외국어 교육 플랫폼 기업 골드앤에스 역시 실적 개선에도 시총만을 기준으로 충분한 준비 기간 없이 상장폐지 절차를 밟는 것은 신뢰보호 원칙에 어긋난다며 가처분을 냈다.
경영권 인수를 추진 중인 에넥스의 인수자 에넥스미래성장조합 측도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소형주 특성상 단기적인 주가 변동에 따른 ‘관리종목 낙인효과’가 자금 조달 및 기업 정상화를 가로막아 소액주주와 기업 모두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힌다는 주장이다.
이번에 주연테크와 케이엠제약의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지면서 비슷한 처지에 놓인 기업들의 법적 대응은 더욱 확산할 가능성이 커졌다. 현재 시총 200억원 미만 코스닥 상장사는 72곳, 주가 1000원 미만인 ‘동전주’는 44곳에 달한다.
그동안 퇴출 위기에 놓인 기업들은 강화된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주식병합이나 감자 등 자본구조 변경에 적극 나서왔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주식병합을 결정한 코스닥 기업은 지난달 4일 기준 220개사로 지난해 15개사의 약 15배에 달한다. 법원의 이번 판단을 계기로 기업들의 대응 수단이 자본구조 변경을 넘어 가처분 신청 등 법적 대응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최종수 법무법인 세담 변호사는 “동전주나 시가총액 미달을 이유로 한 퇴출 절차는 전례가 없어 대응 기간 부족 등을 이유로 불복 절차를 밟는 기업들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면서 “정부 정책과 거래소 규정의 취지가 확고한 만큼, 기업 측이 경영 정상화나 실질적인 개선 가능성을 법원에 얼마나 구체적으로 소명하느냐에 따라 효력정지나 결정 번복 여부가 갈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줄소송 확산…부실기업 퇴출 로드맵 흔들기업들이 잇따라 불복 절차에 나설 경우 부실기업 퇴출 절차가 사실상 멈춰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당국은 코스닥 시총 상장유지 기준을 지난해 40억원에서 올해 1월 150억원, 7월 200억원으로 높였다. 내년 7월에는 300억원으로 강화할 예정이다.
하지만 법원이 현행 구조를 문제 삼으면서 제도 보완 가능성이 커졌다. 거래소가 시총 미달 기업에도 이의신청권이나 개선 기간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손질할 경우 당초 정책 목표였던 ‘신속 퇴출’과 충돌할 수도 있다.
투자자 불확실성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있다. 법원이 상장폐지 효력을 정지하더라도 해당 기업의 주식 거래가 곧바로 정상화되는 것은 아니다. 가처분과 본안소송이 장기화할 경우 투자자 자금이 장기간 묶이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안유미 자본연 선임연구원은 “시장가격 요건에는 미달하더라도 재무 여건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기업이 일부 확인된다”며 “현행 (코스닥 시총) 200억원 기준의 적용 결과와 실제 퇴출 기업의 특성을 점검하고 추가 기준 상향이 기업과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지속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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