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데일리 하상렬 기자]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올해 2분기 42.6%로 전분기보다 2.2%포인트 하락했다. 지표상 호전을 보였지만, 이는 반도체 수출 호조 등에 따른 명목 성장률 급등이 빚의 무게를 일시적으로 가린 ‘안정성 착시(Illusion of stability)’라는 지적이 나온다. 장부상 지표 개선에 기댄 정부가 빚 갚기를 미루고 대규모 적자 편성을 이어가는 것에 대한 전문가들의 비판도 제기된다.
◇“착시 걷히면 부채 비율 폭등”6일 이데일리가 입수한 국제금융협회(IIF) ‘글로벌 부채 모니터(Global Debt Monitor)’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올해 2분기 기준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42.6%로 전 분기(44.8%) 대비 2.2%포인트 하락했다. 지난해 4분기(48.6%) 정부부채 비율이 50%선에 가까워지며 재정 건전성 우려가 커졌지만, 안정세가 굳어지는 모습이다.
우리나라 정부부채 비율은 주요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IIF가 집계하는 선진국 그룹 12개국 중 11위에 해당한다. 일본(203.4%), 미국(119.0%), 프랑스(111.4%), 영국(81.4%) 등은 모두 한국을 크게 웃돌았다.
부채 비율만 떼어놓고 보면 재정이 눈에 띄게 건전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지표 개선은 최근 세계적으로 관측되는 인플레이션발(發) 부채 착시와 궤를 같이한다는 게 IIF의 진단이다. IIF는 “높은 인플레이션이 명목 성장을 끌어올려 부채 비율 상승을 억제한 ‘안정성 착시’를 반영한다”며 “이러한 외견상의 안정세가 정부와 민간이 짊어지고 있는 실질적인 이자 상환 부담의 급증을 가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국내 재정 전문가들도 이같은 착시 현상의 위험성을 꼬집었다. 김우철 한국재정학회장(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은 “명목 GDP가 이례적으로 20% 가까이 급증하면서 발생한 순전한 ‘분모 효과’”라며 “실질 성장률을 제외한 대부분은 반도체 수출 단가 상승 등 GDP 디플레이터(물가 효과)에 기인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김 교수는 정부가 재정 건전화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초과 세수가 들어왔을 때 이를 국채 상환에 쓰지 않고 ‘미래대응기금’ 명목으로 쌓아두는 것은 국가재정법에 정면으로 어긋난다”며 “디레버리징(부채 감축)을 거부한 채 내년에도 12.8%의 지출 증가율을 잡아 100조원대 적자 빚을 내는 것은 매우 공격적으로 빚을 늘리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어 “향후 반도체 가격 하락으로 착시 효과가 사라져 명목 GDP가 쪼그라들 경우, 이미 씀씀이가 커져 고착화된 지출 구조 탓에 부채 비율은 걷잡을 수 없이 폭등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같은 우려는 수치로 확인된다. ‘2026~2030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보면 연평균 11.8%의 국세 수입 증가를 전제로 짰음에도, 국가채무는 올해 1412조 8000억원(추가경정예산 기준)에서 2030년 1734조 1000억원으로 불어난다. 관리재정수지 적자도 100조 8000억원(GDP의 -2.9%)까지 커질 전망이다. 향후 반도체 착시가 걷혀 세수 전망치가 꺾일 경우, 부채 비율이 걷잡을 수 없이 폭등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다.
◇가계부채 비율도 하락…이자 부담은 가중비율 하락 착시는 경제를 떠받치는 민간 부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IIF에 따르면 2분기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85.0%로 전 분기(87.8%)보다 2.8%포인트 내렸고, 비금융기업 부채 비율 역시 110.8%에서 108.6%로 2.2%포인트 하락했다.
지표상으로는 하향 안정화 흐름이지만 실물 경제가 체감하는 빚 부담은 최고조에 달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분기 가계신용 잔액은 사상 처음으로 2000조원을 돌파했다. 수도권 주택 매수 심리 자극으로 주택담보대출이 크게 늘어난 데다 대출 금리 상승세까지 겹치면서 가계의 실질적인 이자 상환 부담은 갈수록 가중되고 있다.
한은과 금융당국이 비율 하락에도 불구하고 가계부채 총량 관리의 고삐를 늦추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장정수 한은 부총재보는 최근 9월 금융안정상황 설명회에서 “명목 GDP가 커졌어도 소득 개선 효과는 부문별로 온도 차가 있다”며 “가계부채 관리 기조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내부에서도 지표의 착시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 8월 금통위 의사록을 보면, 한 위원은 가계의 실질 상환 부담은 명목 GDP가 아닌 소득에 좌우된다며 지표 하락과 실제 체감 부담 사이의 괴리를 염두에 두고 엄격하게 정책을 운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통상 국제결제은행(BIS)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주요 국제기구의 부채 통계는 각국 데이터를 취합해 발표하기까지 반년가량 시차가 발생한다. 반면 전 세계 주요 금융기관 연합체인 IIF 보고서는 세계 부채 흐름을 신속하게 집계해, 최신 글로벌 동향을 가장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속보성 지표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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