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정윤지 기자] “고급 빌라라고 해도 요즘 누가 이런 곳에 살고 싶어 하나요. 같은 값이어도 오르는 속도가 다른데 아파트로 가는 분위기죠”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서만 30년 넘게 중개사무소를 운영하는 온 A공인중개사는 최근 이곳을 찾는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했다. 부의 상징과 같은 대형 단독 주택과 고급 빌라가 매수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는 “은퇴한 고령 자산가가 아닌 이상 대부분은 집을 수리해 내놓고 떠나고 있다”고 했다.
서울 전통 부촌의 고급 빌라와 신흥 부촌의 신축 아파트 간 자산가치 격차가 뚜렷해지고 있다. 과거 자산가들이 모이던 평창동·성북구 성북동·서초구 서래마을이 지고 신축 아파트를 중심으로 집값 상승세가 이어지면서다. 주거 편의성과 자산가치 상승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강남·성동 일대 신축 아파트로 고액 자산가들의 선호가 이동하며 부촌 지형도 달라진다는 분석이다.

18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과 네이버부동산에 따르면 전통 부촌의 고급 빌라와 신흥 부촌의 아파트 간 가격 상승률 격차는 뚜렷하다. 평창동과 서래마을, 성북동의 주요 고급 빌라 가격은 최근 10년여간 20~50%대 상승에 그친 반면 반포와 성수의 하이엔드 아파트는 같은 기간 200% 넘게 올랐다.
실제 평창동 고급 빌라인 오보에힐스3단지 전용 271㎡은 2014년 5월 24억5000만원에 거래됐다가 지난 6월에는 39억에 손바뀜했다. 12여년간 가격 상승률은 59% 수준이다. 서래마을 효성빌라 전용 227㎡는 2016년 5월 16억550만원에서 올해 4월 23억원으로 올라 10년간 39.3% 상승했다. 성북동 신원빌리지 전용 172㎡ 역시 2016년 3월 11억5000만원에서 올해 6월 13억7500만원으로 오르는 데 그쳤다.
반면 신축 고급 아파트의 가격은 가파르게 뛰었다. 2016년 준공한 반포동 아크로리버파크 전용 84㎡는 2016년 5월 17억9500만원에서 올해 5월 55억5000만원으로 상승했다. 10년 만에 209%가 오른 것이다. 성동구 성수동 트리마제 전용 84㎡도 2017년 14억6000만원에서 올해 7월 46억5000만원으로 올라 9년간 가격이 219% 상승했다. 주택 유형과 면적은 다르지만 주요 거래 사례에서 아파트의 가격 상승세가 두드러지는 모습이다.
앞서 평창동과 성북동은 1960년대부터 부촌으로 자리잡았다. 재개발로 고급 주택이 들어서며 자산가들이 몰렸다. 서래마을도 2010년대 초반 재벌총수나 연예인 등이 몰리며 강남 대표 부촌이 됐다. 독립적인 공간과 조용한 주거 환경, 사생활 보호가 가능하다는 점이 이들 지역의 강점으로 꼽혔다.
다만 주택이 노후화하고 편의성 면에서 아파트에 밀리며 매수 수요가 끊겼다는 게 현장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전통 부촌에서는 ‘아파트보다 저렴한 고급빌라’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평창동의 또 다른 공인중개사는 “같은 고급 빌라여도 리모델링한 매물은 거래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매물은 처음 산 가격 대비 헐값이 된다”며 “관리 부담이 커 빈집도 많은 편”이라고 했다.
주거 선호가 아파트로 이동한 배경에는 생활 방식의 변화도 있다. 보안과 주차, 시설 관리를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단독 주택과 달리 신축 아파트는 주차장과 커뮤니티 시설,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을 갖춰 생활 편의성이 높다. 과거 대가족 중심 생활에서 1~2인 가구 중심으로 가구 규모가 작아지며 넓은 단독주택을 유지할 필요성이 줄어든 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자산 가치 측면에서도 신축 아파트를 선호할 유인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심형석 법무법인 조율 전문위원은 “고급 빌라는 매물로 내놔도 잘 안 팔리는 반면 아파트는 가격만 조정하면 매매가 이뤄지는 만큼 자산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할 때 환금성이 높은 아파트를 선호하는 것”이라며 “과거엔 외부와 단절돼 사생활 보호하는 데 의미를 뒀다면 최근에는 벤처기업가나 인플루언서등 젊은 자산가들이 부를 드러내는 방식도 달라졌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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