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정두리 기자] 정부가 재생에너지 확대에 맞춰 에너지저장장치(ESS) 보급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정작 공공기관 ESS 설치 의무제도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설치 의무 대상보다 예외·면제를 받은 곳이 더 많은 데다 의무 대상 가운데 실제 ESS를 설치한 곳도 10곳 중 4곳에 못 미쳤다. 특히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설비를 일정 규모 이상 설치하면 오히려 ESS 설치 의무를 면제해주는 규정까지 두고 있어 제도 취지에 역행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데일리 김일환 기자]](http://image.edaily.co.kr/images/photo/files/NP/S/2026/10/PS26101200012.jpg)
11일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곽상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한국에너지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이데일리와 분석한 결과, 공공기관 ESS 설치 의무 대상 건축물은 362곳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ESS 설치를 마친 곳은 139곳에 불과했다. 이행률은 38.4%로, 나머지 223곳은 아직 설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공공기관 ESS 설치 의무제도는 전력피크 저감 등을 위해 계약전력 2000킬로와트(kW) 이상 공공기관 건축물에 계약전력의 5% 이상 규모 ESS를 설치하도록 한 제도다. 2016년 도입돼 기존 건물은 규모에 따라 2017~2020년까지 설치를 마쳐야 했지만 정부는 설치 기한을 두 차례 연장했다. 2020년에는 2023년 말까지로, 2023년에는 다시 2025년 말까지로 미뤘다. 그러나 마지막 유예기간이 끝났는데도 이행률은 40%를 밑돌고 있는 실정이다.
기관 유형별로 살펴보면 중앙행정기관은 의무 대상 65곳 가운데 20곳만 ESS를 설치했고 45곳은 미이행 상태였다. 지방자치단체도 118곳 가운데 37곳만 이행했다. 공공기관은 95곳 중 46곳, 지방공사·공단은 40곳 가운데 18곳이 설치를 완료했다. 국립대학병원은 의무 대상 2곳 모두 미이행 상태였다.
지역별 격차도 컸다. 서울은 의무 대상 77곳 가운데 23곳만 설치해 이행률이 29.9%에 그쳤다. 부산은 19.4%, 대구는 13.0%였으며 제주는 의무 대상 6곳 가운데 설치를 완료한 곳이 한 곳도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설치 의무를 적용받지 않는 예외가 오히려 의무 대상보다 많다는 점이다. 곽 의원실이 확보한 ESS 설치의무 예외·면제 공공건물 명단을 분석한 결과, 총 511곳이 설치 대상에서 빠진 것으로 나타났다. 의무 대상 362곳의 약 1.4배에 달한다. ESS를 설치해야 하는 공공건물보다 설치하지 않아도 되는 공공건물이 더 많은 셈이다.
예외 사유별로 보면 임대·임차 건축물이 364곳으로 가장 많았다. 최대 피크전력이 계약전력의 30% 미만인 시설이 121곳으로 뒤를 이었다. 신재생에너지 설비를 계약전력의 5% 이상 설치해 면제받은 곳도 84곳에 달했다. 이 밖에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인정한 시설 57곳, 발전·전기공급·가스공급시설 등 40곳, 병원·초중고·노인복지시설 43곳, 버스·철도·지하철·공항시설 12곳 등이었다.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은 신재생에너지 설비를 설치한 건축물에 ESS 설치 의무를 면제해주는 규정이다. 현행 기준상 신재생에너지 설비 용량이 계약전력의 5% 이상인 시설은 ESS 설치 의무에서 제외된다. 2023년 8월 고시 개정 과정에서 기존 4개였던 예외 조항이 7개로 늘면서 추가된 규정이다.
이는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라 전력 저장 필요성이 커지는 정책 환경과 배치된다는 지적이다. 태양광 발전은 낮 시간대 발전량이 집중되는 만큼 전력수요가 적을 때 생산한 전기를 저장했다가 수요가 높은 시간대 활용할 수 있는 ESS가 중요하다. 그런데 현행 제도는 신재생에너지를 일정 규모 이상 설치하면 오히려 ESS 설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이다.
공공기관의 낮은 이행률을 끌어올릴 유인책도 미흡하다는 평가다. 공공기관 에너지이용 합리화 이행실적 평가에서 ESS 설치에 배정된 점수는 전체 96점 가운데 2점에 불과하다. 옥외 LED 조명 보급률에 10점이 배정된 것과 비교하면 5분의 1 수준이다.
해외 주요국이 ESS 보급 확대를 위해 적극적인 재정 지원책을 운영하는 것과도 대비된다. 미국은 ESS 투자비에 대해 기본 6%, 최대 30%의 투자세액공제를 적용하고 있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도 국가보조를 통해 ESS 구축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영국은 장주기 ESS에 대해 최소 수익을 보장하는 ‘캡앤플로어(Cap&Floor)’ 제도를 도입했다. 사업자의 수익이 사전에 설정한 하한선보다 낮아지면 최소 수익을 보장하고, 반대로 상한선을 넘어설 경우 초과 수익을 환수하는 방식이다. 초기 투자 부담과 수익성 불확실성을 낮춰 민간의 장기 ESS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장치다.
곽상원 의원은 공공기관이 ESS 초기 시장을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하는 만큼 예외 규정을 재정비하고 미이행 기관에 대한 관리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곽 의원은 “제도 초기에는 화재 우려 등으로 ESS를 꺼렸던 것도 사실”이라며 “ESS기술이 크게 발전한 만큼 제도 역시 실효성을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예외를 정비하고 미이행 기관에는 실질적인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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