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최정희 기자] 2025년 2월, 1심 재판에서 남성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이 기소한 지 9개월, 그날 밤으로부터 약 3년 6개월 만에 이뤄진 선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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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을 강간죄로 처벌하려면 두 가지가 증명돼야 한다. 첫째, 여성이 원하지 않았다는 것. 둘째, 여성이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다는 것.
1심 판결문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상급심 판결로 미루어 보면 1심은 첫 번째 요건은 인정될 여지가 있어도, 두 번째 요건은 증명되지 않았다고 봤다. 여성이 싫다고 했을 수는 있지만, 강간죄에 필요한 수준의 폭행까지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판단의 중심에 바지가 있었다. 여성은 그날 고무 밴딩 슬랙스를 입었고, 남성이 강제로 벗기는 과정에서 허리 밴드 아래가 두 군데쯤 뜯어졌다고 했다. 사진도 냈다. 남성은 여성이 그날 입은 바지는 단추 달린 검정 청바지였다고 했다.
그런데 수사 단계에서 여성의 직장 동료들은 그 사진 속 바지가 그날 입었던 바지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한 터였다. 게다가 바지 실물은 1심 법정에선 나오지 않았다. 여성이 2024년 1월 바지를 검찰에 냈지만, 검찰은 1심에서 이를 증거로 내지도, DNA 감정을 하지도 않았다.
1심에선 남성의 ‘강압적으로 한 것은 미안해’라는 메시지는 헤어지자는 여성을 달래려는 사과일 뿐, 법적 의미의 폭행을 인정한 말은 아니라고 봤다. 관계 직후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다정한 메시지가 오갔다는 점, 거짓말탐지기 검사에서 “여성이 스스로 바지를 벗었느냐”는 질문에 남성이 “네”라고 답했고, 이에 진실 반응이 나왔다는 점도 남성에게 유리한 사정이었다.
검찰은 항소했다. 그리고 항소심에서 마침내 실물의 바지가 등장했다. 2025년 11월 나온 DNA 감정 결과, 슬랙스 안쪽에서 남성의 DNA가 검출됐다.
남성은 그날 여성이 청바지를 입었다고 했다. 그런데 여성이 낸 슬랙스에서 남성의 DNA가 나온 것이다. 바지는 여성의 말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됐다.
그러자 항소심은 1심의 판단을 하나씩 뒤집었다. 남성의 말들도 다르게 읽혔다. ‘몸을 아프게 한 죄인’, ‘너는 싫어했지만’, ‘적당히 튕기는 거라 생각했다’는 말은 여성이 거부했다는 증거가 됐다.
관계 직후의 다정한 메시지에 대해서도 항소심은 다르게 봤다. 만난 지 나흘밖에 안 된 상황에서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고, 여성은 혼란 속에서 바로 거부감을 드러내지 못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해선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좁은 승용차 뒷좌석이라는 공간도 고려됐다. 그런 곳에서는 큰 폭력이 없더라도 여성이 저항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봤다. 남성은 여성보다 키도 10센티 이상 컸고, 몸무게도 10kg 넘게 나갔다. 거짓말탐지기의 진실 반응은 참고 자료일 뿐, 여성의 진술을 뒤집을 근거는 아니라고 했다.
남성은 바지가 2년 넘게 여성의 집에 있었으니 DNA가 오염됐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항소심은 여성의 ‘증거물로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해 따로 보관했다’는 말을 근거로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소심은 2026년 2월, 남성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1심 ‘무죄’가 ‘유죄’로 바뀐 순간이었다.
남성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리고 2026년 5월, 대법원(2026도4423)은 대법관 전원 일치로 항소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바지의 DNA가 틀렸다고 보지 않았다. 다만 DNA는 바지에 남성의 DNA가 있다는 사실만 알려 줄 뿐, 그것이 언제 어떻게 묻었는지는 말해 주지 않는다고 했다. DNA 같은 과학적 증거가 판결을 좌우하려면, 증거물이 채취되고 보관되고 분석되는 모든 과정에서 바뀌거나 오염되지 않았다는 게 증명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이 짚은 문제는 세 가지였다.
첫째, 바지는 그날 밤 이후 2년 5개월 동안 여성의 옷장에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보관됐는지는 “따로 보관했다”는 여성의 말 한마디뿐, 확인된 것이 없었다.
둘째, 수사 초기 여성의 직장 동료들은 여성이 낸 바지 사진을 보고, 그날 여성이 출퇴근할 때 입었던 바지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여성의 주장과 어긋나는 진술이 있었는데도, 수사기관은 바지를 2년 넘게 여성에게 맡겨 둔 채 확인하지 않았다.
셋째, DNA가 묻은 위치가 이상했다. 바지를 벗기는 과정에서 실랑이가 있었다면 바지 겉면에도 남성의 DNA가 묻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남성의 DNA는 바지 안쪽 한 곳에서만 나왔다. 정작 겉면에서는 누군지 모르는 남성의 DNA가 12곳에서 검출됐다.
그래서 대법원은 바지가 오염되지 않았다는 점을 검사가 추가로 증명해야 한다고 봤다.
대법원은 남성이 무죄라고 한 것은 아니다. ‘피해자다움’을 요구해선 안 된다는 항소심의 판단은 옳았다고 했고, 수사기관이 바지를 일찍 확보하지 않은 잘못을 여성의 진술을 의심하는 이유로 삼아선 안 된다고도 못 박았다.
사건은 고등법원에서 다시 심리 중이다. 바지의 보관 과정이 증명될지, 아니면 바지 없이 남은 증거만으로 판단하게 될지 아직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었던 바지는 수사 초기에 확보되지 못했다. 그 공백은 5년의 지난한 공방을 더 길고 어렵게 만들었다.
나흘, 그리고 그날 밤 20분① [그날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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